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리 여왕(스코틀랜드) (문단 편집) === [[스코틀랜드 왕국|스코틀랜드]]의 [[여왕]] === 메리가 프랑스 궁정에서 투닥거리고 있을 동안 메리가 명목상 [[여왕]]인 본국 스코틀랜드는 내전에 휩싸이고 있었다. 당시에는 [[유럽]] 전역에서 [[종교개혁]]이 일어나 [[루터회]], [[성공회]] 등 여러 [[개신교]] 교파들이 생겨나고 있던 상황이었다. 스코틀랜드에도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었다. 1559년 존 녹스가 [[스위스]]에서 귀국하여 유럽 대륙의 개혁[[신학]]을 전파했는데, 이 신학은 잉글랜드의 위에서의 [[종교개혁]][* 국왕 [[헨리 8세]]에 의해 [[성공회|영국국교회]]가 만들어짐.]과 다른 형태였다. 당시 스코틀랜드를 통치한 것은 메리의 모후 마리 드 기즈였는데, 기즈 가문은 프랑스 왕실에서도 경악할 정도로 골수 [[가톨릭]]이었고, 그 영향을 받은 섭정 대비 마리 드 기즈도 역시 [[가톨릭]] 신자였다. 마침 존 녹스가 스위스에서 돌아와 잉글랜드와 가까운 로우랜드에서 개혁신학을 가르치고 나섰고, 이에 찬성하는 귀족들과 사제들이 점점 늘어났다. 이에 스코틀랜드 [[가톨릭교회]]를 수호하려는 기즈 대비와 비튼 [[추기경]], [[https://en.m.wikipedia.org/wiki/James_Hamilton,_Duke_of_Ch%C3%A2tellerault|제임스 해밀턴]][* 아란 백작으로 이 사람의 후손인 제임스 해밀턴이 [[30년 전쟁]] 당시 스웨덴 군에 종군하며 신교도 장군으로 싸운 공을 인정받아 해밀턴 공작으로 격상된다. 참고로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 당시의 영국군 기병대장이자 최초의 원수인 [[https://en.m.wikipedia.org/wiki/George_Hamilton,_1st_Earl_of_Orkney|오크니 백작 조지 해밀턴]]은 이 사람의 현손이다.][* 참고로 [[https://en.m.wikipedia.org/wiki/Duke_of_Hamilton|해밀턴 가문]]과 분파들은 여성 승계를 인정하여 2분파인 오크니 가는 현재 백작이 해밀턴 가와는 '''거의 남남'''이다. 비슷한 계승법을 가진 가문은 말버러 공작가, 파이프 공작가다. 참고로 말버러는 [[존 처칠]]의 딸의 모든 후손이 계승 가능하고 파이프는 1대 공작의 딸들의 남계 후손(그래서 사우스테스크 백작가로 작위가 넘어감)이 계승 가능하고 해밀턴은 '''1대 공작의 모든 후손'''(...)이다.]이 박해에 나서자, 거의 내전상태나 다름 없는 상황이 되었다. 초기에는 권력을 쥔 마리 드 기즈가 여러 번 존 녹스를 위시한 [[개신교]] 세력을 털었다. 그러나 중도에 비튼 [[추기경]]이 암살 당하고, 기즈 또한 외국인인지라 기반이 부족한데다 선량한 성격이라 개신교도들을 가혹하게 숙청하지 못해서[* 무력이 아니라 대화로 통치한 점 때문에 정적인 존 녹스를 제외하면 의외로 개신교 계열 인물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.], 점점 가톨릭 세력은 밀려나고 녹스와 녹스를 후원한 [[개신교]] 시민계급과 신학자들의 세력이 더 커져가고 있었다. 이 때 메리가 스코틀랜드에 온 것이었다. 종교적으로도 갈등이 있었지만 정치적 갈등도 있었다. 이미 [[헨리 8세]] 시기와 [[에드워드 6세]] 시기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에서 2번이나 처참하게 박살나서 주력 병력이 전멸당했고 [[에든버러]]까지 약탈당했다. 때문에 스코틀랜드 내에서 국력 격차를 절감한 세력들, 특히 잉글랜드와 접경지대인 로우랜드를 기반으로 한 세력은 프랑스에 의존하고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기존의 [[외교]] 정책에 회의적이었다. 한편 스코틀랜드의 [[종교개혁]] 세력들은 [[가톨릭]] 세력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가톨릭과 단절하고 [[영국 국교회]]를 채택한 잉글랜드에 SOS를 보낸다. 당시 잉글랜드 [[여왕]]이던 [[엘리자베스 1세]]는 신하들이 합법적인 왕에게 반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, 개혁세력이 친잉글랜드 성향이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들을 도와 주었다.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내전에 불을 더 붙였다. 이 스코틀랜드 내전에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자, 결국 메리의 외가이자 마리 드 기즈의 친정인 프랑스에서도 개입한다. 1560년 1월 에든버러 앞바다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며 잉글랜드가 승기를 잡기 시작한다. 때마침 메리의 모후 마리 드 기즈도 죽었기에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강화를 선택하였으며, 에든버러 조약을 맺어 과부가 된 (프랑스 전 왕비) 메리가 귀국하여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도록 하고, 양국 병력은 스코틀랜드에서 전부 철수하기로 했다. 말이 강화지 결국 [[종교개혁]] 세력이 이긴 것이다. 이처럼 메리는 실질적인 [[개신교]] 국가에 [[가톨릭]] 군주로 즉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, 정치적으로 고립된 처지였다. 더군다나 메리는 말이 좋아 스코틀랜드 여왕이지, 6세 때부터 13년간이나 프랑스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를 몰랐고 사실상 [[프랑스인]]이었다. 그런 탓에 [[프랑스어]]와 [[라틴어]]는 구사했으나 정작 스코틀랜드의 언어였던 [[스코트어]]랑 [[스코틀랜드 게일어]]는 아예 못했다. 그리고 풍요롭고 우아한 고급 문화가 발달했던 프랑스 왕실에서 자랐던 메리는 척박하고 음침한 날씨에 문화적으로도 엄숙주의가 대세인 스코틀랜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. 특히 이 시절 스코틀랜드는 [[종교개혁]]의 영향으로 회화, 조각, 거대 건축물 등 눈에 보이는 형상을 아예 우상이라며 배척하던 분위기였기 때문에, 더더욱 이질감이 심했다. 게다가 당시 스코틀랜드는 실세였던 모레이 [[백작]] 제임스 스튜어트[* [[제임스 5세]]가 정부인 레이디 마거릿 얼스킨에게서 낳은 아들로, 메리에게는 이복오빠가 된다.]을 비롯한 귀족들 대부분이 [[개신교]] 신자였기 때문에, [[가톨릭]] 신자인 메리와 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사이었고,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기 전 해에 그녀의 생모이자 섭정이었던 마리 드 기즈마저 병사했기 때문에, 외톨이 신세가 된 메리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이 없었다. 무엇보다 스코틀랜드는 15세기부터 지속적으로 국왕이나 왕위계승자가 요절했기 때문에 왕권이 약했다. 그래서 유력 [[클랜]]의 당주인 대귀족, 왕실 직할지로 실질적으로는 자치권을 누리던 에딘버러, 퍼스, 애버딘 등 도시 시의회, 그리고 [[종교개혁]] 이전에는 고위 [[추기경]], 개혁 이후에는 [[장로회]] 국민교회의 최고회의인 장로총회 등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. 이런 상황에서 현지에 아무 기반이 없는 메리가 프랑스 세력을 끌고 들어와 갑작스럽게 군주 행세를 하려고 했으니, 기존의 세력자들은 당연히 메리를 경계했다. 한편 [[헨리 8세]]는 메리 스튜어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. 그는 메리가 외국의 왕족인 것과 자신의 아들 [[에드워드 6세]]와의 약혼이 깨진 것을 구실로 들었다. 하지만 메리는 헨리 8세의 누이 [[마거릿 튜더|마거릿]]의 손녀이자 [[헨리 7세]]의 후손이기 때문에, 잉글랜드에 잔존한 [[가톨릭]] 세력에 지지를 받았다. 왕위에 오르기 전 [[엘리자베스 1세]]가 메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. 다만 개인적으로는 메리와 수 차례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서신으로 교류한 바 있다. 한동안 엘리자베스에게 우호적이었던 메리의 태도는 [[헨리 8세]]가 박탈한 왕위 계승권을 다시 인정받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. 그러나 오직 서신으로만 교류했을 뿐 두 사람이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, 일각에서는 "예의상 좋은 말로 교류한 것일 뿐이지, 사실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 문제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사이었다"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. 기본적으로 메리는 [[엘리자베스 1세]]가 즉위할 때 에든버러 조약을 비준하지 않는 등, 엘리자베스에게 여러모로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. 앞서 에든버러 조약으로, 메리와 [[프랑수아 2세]] 부부는 적법한 잉글랜드 군주라는 칭호를 포기하기로 합의했다. 그러나 메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란 탓에 반잉글랜드&반[[개신교]] 성향이 강했다.[*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적대관계였고 왕실에서 개신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며 탄압했다.] 때문에 메리는 [[엘리자베스 1세]]가 즉위한 후에도 비공식적인 루트로 계속 자신이 적법한 잉글랜드 여왕이라고 주장했으며, 결국 이로 인해 잉글랜드가 반발하여 양국의 관계가 험악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